한국형 21세기 오페라, 물의 신화를 다시 쓰다

2025년 5월 25일(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세계 초연된 창작 오페라 《The Rising World: 물의 정령》은 국내 창작 오페라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며 관객들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예술의전당이 자체 제작한 첫 영어 오페라이자, 세계적 작곡가 메리 핀스터러(Mary Finsterer)와 극작가 톰 라이트(Tom Wright)의 협업으로 탄생한 이 작품은 고전적인 오페라 형식에 현대적인 주제와 예술적 실험을 결합해 주목받았습니다.
작품의 배경은 물의 재앙으로 위기에 처한 상상의 왕국입니다. 병으로 쓰러진 공주를 살리기 위해 왕실은 전설 속 ‘물시계 장인’과 그녀의 제자를 불러들입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두 여성, 즉 과거 물과 시간을 지배했던 지혜로운 여성 장인과 위태로운 생명을 지닌 젊은 공주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장인은 생명의 지혜를 물의 흐름에서 찾아내려 하고, 공주는 물의 정령과 마주하며 스스로의 운명을 깨달아갑니다. 이처럼 중심 서사를 여성의 손에 맡긴 점은 전통 오페라에서는 드물게 볼 수 있는 구성으로, 세대 간의 지혜의 이동과 여성의 구원 서사를 섬세하게 풀어냅니다.

메리 핀스터러 Mary Finsterer 의 음악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학적 성취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그녀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음악의 다성적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물의 흐름과 시간의 순환이라는 주제를 정교하게 음악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특히 전자음향과 전통 관현악, 거문고와 같은 한국 악기를 결합하여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이뤄냈습니다. 영어, 한국어, 라틴어가 혼합된 대사 역시 단순한 언어적 실험을 넘어, 시간과 문명의 겹침을 상징하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작곡가는 “언어는 기억을 담는 그릇이며, 과거의 언어로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밝히며, 음악과 언어의 경계를 넘는 작업을 선보였습니다.
핀스터러는 이 작품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소리 안에서 교차하는 음악적 세계를 창조하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르네상스 다성음악, 오페라 전통, 그리고 아방가르드 기법을 융합하여 구조적이면서도 유동적인 음악 언어를 형성하였으며, 이는 물이라는 오페라의 중심 모티프를 음악적으로 반영합니다. 전통 한국 악기를 포함한 다층적인 악기 편성은 작품의 문화적 뿌리를 살리면서도 새로운 음향적 지평을 엽니다. 라틴어, 영어, 한국어가 뒤섞인 성악은 언어와 시간, 은유의 의미를 탐색하며, 전자음악과의 조화는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독특한 음향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The Rising World: 물의 정령》는 핀스터러가 2017년 《Biographica》로 오페라 작곡가로 자리매김한 이후, 그녀의 음악적 역량이 다시 한 번 정점에 달한 작품입니다. 핀스터러는 루토스와프스키, 베리오, 루이 안드리센 같은 20세기 음악의 거장들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르네상스 기법과 현대 작곡법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점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에 비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암스테르담 뮤직게바우, 멜버른 심포니, 호주 전역의 주요 페스티벌과 오케스트라에서 활약하며, 헐리우드 영화 《다이하드 4》와 《South Solitary》 등의 영화 음악 작업도 병행해온 다재다능한 작곡가입니다.

《The Rising World: 물의 정령》는 그녀의 최근작 《Antarctica》에 이어, 자연과 인간, 과거와 미래, 혼돈과 질서, 그리고 시간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예술적으로 탐색하는 대작입니다. 관객은 이 오페라를 통해 물과 소리, 기억과 운명 사이를 넘나드는 동화 같은 여정에 초대받습니다. 작품은 기후 위기와 인간의 탐욕,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담아내며 관객들에게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무대 연출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무대미술과 조명, 그리고 몽환적인 연기로 구현되었는데요. 공주 역을 맡은 소프라노 황수미는 “마치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경고처럼 다가오는 작품이었습니다”라고 전하며, 자신 역시 노래를 부르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무대에는 황수미(공주 역), 김정미(장인 역), 로빈 트리츨러, 애슐리 리치스, 정민호 등 국내외 정상급 성악가들이 참여하였고, 세계적인 지휘자 스티븐 오스굿(Steven Osgood)이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연출은 스티븐 카(Stephen Carr)가 맡아 서사와 음악, 무대예술의 조화를 끌어냈습니다. 특히 창작 과정에서 작곡가와 극작가가 직접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자연, 언어, 전통문화에 대한 리서치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진정성과 완성도는 더욱 높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예술의전당은 이번 작품을 시작으로 영어 창작 오페라를 정례화하며, 세계 무대에서도 경쟁력을 갖춘 오페라 제작을 이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The Rising World: 물의 정령》은 단순한 신작 오페라를 넘어, 오페라가 시대와 맞닿는 예술로 진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습니다.
본 공연은 2025년 5월 25일(일) 오후 5시와 5월 29일(목), 5월 31일(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진행되었으며, 약 120분(인터미션 포함) 동안 관객들을 깊고 아름다운 물의 세계로 안내하였습니다.
《The Rising World: 물의 정령》을 비롯한 Mary Finsterer 의 주요 작품의 공식 악보와 라이선스는 Schott Music의 한국 공식 파트너 에디션코리아에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